- [성경본문] 고린도전서10:31-3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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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본문: 고전 10:31-33
제목: 소명과 사명
일시: 2023. 10. 23 청주서남교회 종교개혁 506주년
종교개혁자들의 5대 근본 정신 아시지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종교적으로 중세기를 암흑기라 말하지만 사실은 거의 완벽한 종교세계였다는 것입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회복지 분야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지만 원래 교회의 성례전 시스템에서 기원된 용어입니다. 출생 직후 유아세례로부터 임종의 순간 종부성사까지 교회가 책임지는 시스템입니다. 게다가 수도원 운동, 거대한 교회 건축이 왕성했고, 순례여행도 활발했고, 성물 수집도 유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권력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습니다. ‘르네상스 교황기’로 불리기도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2023년을 살아가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에 드러난 현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중세 종교 시스템에 비해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 대형교회들이 많습니다. 한 마디로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한다면 사회에서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종교 개혁 무엇을 바꾸었나? 종교개혁은 기본적으로 1000 동안 지속되어 왔던 중세의 신학의 변화를 가져 왔지만, 종교개혁은 우선 예배를 변화시켰고, 권위주의 체제에 저항하고, 전통과 구습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지로 소통하고, 그소통의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힘을 가지고 왔습니다. 유럽의 국가 중에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와 같이 루터교회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인권, 복지, 보편 교육 등이 잘 되어 있고, 빈부차이가 그리 심하지 않은 나라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예배의 변화가 있었다면 사제가 독점했던 미사 즉 라틴어로 진행하고 사제가 중얼거리는 작은 기도에서 회중들이 참여하는 예배로 바뀌었고, 성찬시에 떡과 잔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로 말미암아 거룩한 예수님의 피가 땅에 떨어질 우려 때문에 회중들에게 떡만 주고 잔을 주지 않았는데, 회중들에게 떡과 잔을 주는 양형성찬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회중 음악이 시작되었고, 예배 중에 설교와 성찬이 균형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직자에 대한 이해가 변하였습니다. 중세 가톨릭에서는 사제가 안수 받는 순간 인간이 훼손할 수 없는 신적인 능력이 주입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그 직무를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사도적 계승이 교황과 주교의 안수를 통해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는 만인제사장직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에 의해 목회자를 선출할 수 있고 해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직무를 위임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황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종교개혁은 소명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소명이란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이 부르심이란 용어는 영적 직무로 부름 받은 자에게만 해당하는 용어였는데, 세속 직업의 영역까지 확장 적용하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진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당시 영적 계급은 주교, 사제, 수도사들이었고, 세속계급은 영주, 기사, 평민, 노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런 계급적 신분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루터는 모든 직업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측면에서 모든 직업이 성직이다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 루터의 소명 이해 * 장목사님과 2013년 종교개혁지 탐방
비텐베르그에 두 교회가 있는데 한 곳은 루터의 95개 논제가 게시되었던 비텐베르고 성교회와 최초의 개신교 예배가 드려졌던 비텐베르고 시교회가 있습니다. 개신교회의 모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1) 비텐베르그 시 교회 - 루터가 2000 여편의 설교를 하였고, 양형성찬을 시행했던 교회입니다. 부켄하겐이 목회자로 위임받아 목회했던 교회입니다.
그림 2) 교회 내부에 종교개혁 제단화가 강단에 걸려 있습니다. 강단 중앙에 네 편의 그림이 있는데, 제목은 십자가 중심적 설교, 성만찬, 세례, 죄의 고백과 용서라 합니다.
그림3) 그 중에 성만찬 장면의 그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나누던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하면 대부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떠올리지만 여가에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이 종교개혁의 정신, 개신교의 신학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그림입니다.
* 그림을 한 번 봅시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지를 찾아봅시다)
1. 다빈치의 그림에 나오는 식탁은 일자형이지만 여기의 식탁은 원탁입니다. 원탁의 상징적 의미는 계급 없이 평등하다는 것이고, 누구나 막힘없이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요한, 베드로, 유다가 예수님 가까이에 있습니다.
2. 12사도 외에 의외의 인물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오른쪽 검은 망토를 입고 수염이 있는 사람이 루터입니다. 그리고 그 루터가 식탁 밖에 있는 한 젊은이에게 포도주를 넘겨주고 있습니다. 그 젊은이가 그림을 그린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아주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당시 중세교회에서는 성찬 때 회중에게 떡만 나누어주고 잔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상징적 그림에서는 사도급에 해당되는 사람이 아닌 평신도에게 잔을 넘겨주고 있는 모습은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다라는 것을 상징하는 대목입니다.
3. 또 한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루터 바로 옆에 있는 긴 수염의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한스 루프트인데, 9월 성경으로 알려진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신약성경을 인쇄했던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한스 루프트는 열두 사도도 아니고,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도 아니고, 그저 동네 인쇄업자였습니다. 이것은 루터의 ‘직업소명론’입니다. 사제뿐만 아니라 세속 직업으로 부름받은 것도 하나님의 소명이고, 이 소명은 이웃을 위한 섬김으로 부름받은 가치 있는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소명이란
소명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소명에는 두 부류의 소명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과 거룩, 제자의 삶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구원을 얻도록 부르셨고, 거룩하게 하도록 부르셨고, 교회의 지체가 되도록 부르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평생 지속되는 보편적 부르심입니다.
또 하나는 일과 섬김, 직업과 사역으로서의 개별적인 부르심입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고 모든 사람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모든 것,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일입니다. 성직자나 평신도나, 예배당이든 일터이든 죄가 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소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 증거 하는 말씀입니다.
고전10: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소명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소명의 진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삶 전체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종종 교회에서 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요, 직업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으로 철저하게 구분하는 성속을 구분하는 견해를 가톨릭적 왜곡이라 부릅니다. 또 하나는 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영적인 것을 희생시킨 채 세속적인 것을 격상시키는 왜곡 현상으로도 나타나기도 합니다. 종종 소명에 응답하는 것을 신부나 목사, 전임 사역자가 되는 것으로만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명은 전 피조세계의 어느 한 영역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 이는 내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라고 외치지 않으신 곳이 없음을 선포하는 삶 전체의 주권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세속의 직업은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성직인가요? 루터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을 말합니다. 자신의 일이 이웃의 유익을 도모하고 섬기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10장 33절의 말씀에서 확신을 얻은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성직입니다.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본문은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 그래서 궁극적으로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도록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어떤 직업이든, 어떤 자리에 있든지 소명을 받은 사람들의 사명의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가?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마5장 16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엡2:10 우리는 그의 지으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다면 2023년을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까요?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땅에 보내어진 구체적인 목적을 한 단어로 소명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또한 우리의 존재, 우리의 행위, 우리의 모든 소유 전체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반응하며 살아가는 삶을 사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오늘 내가 하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 이러한 사명 의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면 오늘 내 삶이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후회나 아쉬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가 우리의 삶의 마지막 날일 수 있음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이번 주가 마지막 주일예배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예배드린다면 예배드리는 마음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고, 주변의 풀 한포기도 새롭게 다가올 것입니다. 가족과 지내는 시간이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고 살아간다면 용서하고 용서받고 하루를 마무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의 설교가 어쩌면 마지막 설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설교하는 자세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 실린 마지막 수업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나는데 나라를 빼앗김으로 인하여 모국어를 수업하는 날로서는 마지막 날 수업에 참여한 한 소년이 느꼈던 감정을 표현한 글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지각도 하고 수업시간에 장난을 쳤지만 그날 마지막 수업시간에 하신 선생님의 말씀은 그 소년에게 잘 박힌 못처럼 새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삶을 대하는 태도를 경건하게하고 진지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는 삶이란 말인가요? 현재 직장과 일터에서 심각한 갈등과 스트레스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 교회 안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직장을 은퇴하면 내 삶의 목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도 마치는 것일까요? 집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 어르신들 중에 몸이 불편하여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야만 하는 분들에게 소명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에게 일자리가 없어도, 내가 병이 들었어도, 내가 나이가 들었어도,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인생이 소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안남기 목사의 목회 여정
코로나 시대 개척교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 환경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과 목회가 무엇일까?
저는 이 소명의 삶을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한 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오래 전 ‘소명과 사명’ 이란 제목으로 제가 쓴 에세이입니다.
내 아버지는 수십 년 간 보따리 장사를 하셨지만 가계를 소유하지 못하셨다. 어릴 적 시장 한 복판에서 좌판을 벌이시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모습, 뜨거운 여름 리어커를 끌고 골목을 다니시는 아버지의 땀 흘린 지친 모습, 명절이 되면 대목을 보신다고 바쁘셨던 모습, 어머니 몰래 한잔 걸치시고 시치미때시는 순진한(?) 장면들이 생각이 난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큰 짐 자전거 뒤에 맛있는 것을 사가지고 오시는 아버지를 기다리곤 했다. 비록 싱싱한 과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흠뻑 먹을 수 있는 가난한 시절의 풍성한 기억이었다. 아버지는 아침이 되면 자전거를 끌고 장에 가시는 이 일을 중간에 한 번도 바꾸지 않으셨다. 거의 30여년, 어릴 적 아이가 바라보았던 아버지는 이 일을 좋아하셨던 것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직업을 거룩한 일로 생각하신 것 같다. 거기에는 자식들을 포기하지 않는 희생적 사랑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정직함이 있었다. 아버지가 끌고 다니셨던 자건거와 리어커 그리고 큰 보따리들...모두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도구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신앙적으로 나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묻어있는 흔적들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나는 아버지의 일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영적인 것임을 인정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죄의 댓가로 힘들게 일하는 노동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노동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엄마가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것과 설교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지금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목사로서 내가 지금 하는 일만 거룩하고 영적인 일이라 생각지 않는다. 내 아버지의 일과 주의 종으로 헌신한 내가 하는 일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삶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중략) 앞으로 10년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버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기쁜 마음으로 작은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맡겨진 일 즉 사명을 감당하고 계신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지고 자랑스러워진다. (중략)
이 할아버지의 소명의 삶을 어릴 적부터 보았던 (7년만에 아이가 생긴) 손녀의 글을 읽어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제목을 붙여 보았는데 “시장표 양말”
아침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아기 양말을 자연스레 손에 집어 소파에 앉았다. 두 손에 가지런히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메이커도 아니고 예쁜 캐릭터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였다. 한 해 두 번 돌아오는 명절에 나는 거르지 않고 선물을 받고 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초등학생 때부터라 한다 해도 지금까지 20여년을 변함없이 받고 있다. 바로 시장표 양말이다. 87세에 나의 할아버지는 지금도 보따리를 풀고 양말을 파신다. 용문동 사거리 그 번잡한 도시 한 가운데서 말이다.
명절에 어김없이 각 가정별로 나누어 돌아간다. 메이커를 원하는 자녀도 있을 것이고 최신 유행에 맞는 디자인을 원하는 자녀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좋은 질을 원하는 자녀도 있을터이나 적어도 내가 봐온 20여년 늘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그리고 이번 추석엔 참석하지 못하여 부모님을 통해 받았다. 거기엔 할아버지의 기쁨을 담은 아기 양말이 하나 더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내 것을 줄 수 있다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없음을 안다. 사람함에도 나눌 수 없는 고통을 지니고 사는 이들의 마음도 안다. 아직도 건강하시어 사랑하는 자손들을 하나 둘씩 헤어리면서 봉투에 담아 내셨을 할아버지의 인자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이 소식을 전하며 고맙다 늘 기도했다 하시던 할아버지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생각하시며 기뻐하시며 미영이네 봉투에 하나를 더 넣으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알고 계실 것이다. 명절 보따리가 풀어질 횟수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할아버지의 시장표 양말은 적어도 우리에게 특별하다. 삶이고 노래이고 기쁨이고 자랑이고 기도의 열매이리라 내년 설에는 어떤 양말을 주실까?...기대해본다.
* 2023년 추석 때에도 받았습니다. 93세 되시는 아버님께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대전중앙시장에 가셔서 도매 물건을 해오시고, 먼저는 담임목사님에게, 그리고 자녀손들에게 가정별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가정별로 축복의 메시지를 친히 하셨고, 10월 9일 손녀 결혼하는 것을 보시고, 11일 야외활동을 하시고, 12일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소명의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누가 우리를 불렀는가? 하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나를 불러주신 분은 누구인가를 항상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직장을 잃었을 때 신앙도 잃어버리도 자신의 존재도 잃어버립니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난 더 이상 소망도 없다고 한탄하며 시간을 죽이며 살아가게 됩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저와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존재로 불러 주셨습니다.
목사만 거룩한 성직자가 아니라는 것을....우리가 어떠한 자리에 있든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부름받은 자의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그 일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성도로 불러 주신 보편적 부르심 앞에 교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 지상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며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온전히 교회를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를 교회의 직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또한 종교개혁의 근본 정신인 직업을 통해서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주인과 종으로 부르시어 일하게 하셨고, 사회적으로는 직업을 통해서 상호 협력하고 섬기도록 부르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영역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가? 예수님처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공생애 3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다니시면서 자신이 왜 세상에 오셨는지 분명히 인식하고 사셨습니다.
*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니라(눅19:10)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은 영원하신 아버지에게로 나와서 아버지가 원하시는 일을 하셨고 다시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소명과 사명의 삶을 온전하게 감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영원히 자유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름 받아 맡겨주신 인생의 소명과 사명의 삶을 다 한 후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평화와 찬송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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