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예레미야애가5:19-2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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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본문 : 애가 5: 19-22
제목 :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
일시 : 2023. 6. 18.
예레미야 애가는 바벨론에 의하여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백성들의 참담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지은 다섯 개의 슬픈 노래 모음집입니다. 파괴된 예루살렘의 모습을 적막한 거리의 모습으로 비유하며 시작합니다.
1:1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예루살렘의 비참한 모습을 마치 신랑 없는 과부 같은 모습이라 비유한 것입니다. 난공불락의 성이었고 공주처럼 존귀한 성이 지금은 강제노동을 하고 있는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황폐한 모습을 절기가 되었음에도 성전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이 없다는 모습으로 슬픔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이전의 시온의 도로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예배하기 위해 절기마다 도로를 가득 메웠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하지 못하는 현상을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하고 있다고 노래한 것입니다. 1장에서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다”는 말로 다섯 번이나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처절하게 파멸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1장 5절에 그의 죄가 많음으로, 1장 8절에서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1장 20절에서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라고 자백한 내용에서 확인하듯이 명백한 너희의 죄 때문이라 증거합니다. 예루살렘은 적이 파멸한 것이 아니라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전이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힌 것도 여호와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라 밝히고 있습니다.
1:10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신앙적 교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입니다.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에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겠지만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징계를 내리시겠다는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할 당시에 경고한 바입니다.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왕상 9:6-7) 하셨습니다. 징계의 수준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고, 전염병으로 고통당할 것이고,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1장 18절에서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2장 17절에서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당한 처참한 현실은 언약에 근거한 심판이었습니다.
2장에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실태를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남유다를 멸망으로 이끈 원인은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예언을 함으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바벨론에 항복하지 아니하고 대항하게 하여 피해가 더 극심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시고 심판하신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막을 헐어버리시며,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2:6),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2:7),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도록(2:20) 버려 두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객과 이방인들조차 유다를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을 헐어버리시고 불태워버리시기까지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애가는 죄의 결과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좌절과 분노, 절망과 원망의 슬픈 탄식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슬프다, 어찌하여!”
2장 1절부터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슬픔을 다시 노래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주께서' 진노하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철저히 주께서 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전에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도시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에서 땅'에 던져졌습니다.
2: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하여 수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서 눈이 상할 정도였습니다. 창자가 끊어지고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한탄합니다. 더욱이 애잔하게 예루살렘으로 ‘내 딸’이라 비유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만 무려 11번이나 반복하여 나오는 단어입니다. 딸이라는 단어 안에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애절한 마음이 다 담겨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되면 보통 자신들의 아픔을 말합니다. 자신들이 파괴당하고 고통을 겪는 것은 자신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딸 예루살렘의 원수가 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그 백성에게 고통을 안기실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예언자는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자요, 백성들의 죄악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하며 긍휼을 구하는 자입니다. 예레미야가 백성의 편에 서서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요 중재자의 사명으로 하나님께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애원과 간구였습니다.
예레미야는 3장에서도 너무나 솔직한 심정으로 멸망으로 말미암은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그는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한다’ 하였고,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그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죽은 지 오랜 자같이' 되었다 고백합니다. 완전히 잊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8절에서는,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심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더 이상 소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화살의 과녁'(3:12)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3:18)
3장 19절에서 지금까지 말한 이런 모든 것들을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담즙은 독이란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겪은 트라우마가 마음의 독이 되어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서는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다른 사람 같습니다. 예레미야가 죄로 인하여 파괴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낙심될 일이었으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마음으로 품었더니 고초와 재난을 당한 일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라가 멸망한 원인을 왕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잘못과 허물을 캐고 뒤지자니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자니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모든 고난의 원인이 바로 우리가 부패하였고 죄로 말미암은 징계라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로 하여금 소망이 되게 했던 바로 그 한 가지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 백성의 강력한 표징은 죄로 말미암는 징계, 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심은 너는 내 백성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대로 나라가 망하지 아니하였더라면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졌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에 따라 징계를 받았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반역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언약 안에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 한 가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마음에 품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를 기반으로 한 ‘신실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허물보다 크신 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끝이 없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모든 것이 파괴된 재난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심판 중에서도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빛을 본 것입니다.
이제 소망의 빛을 발견한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과 자기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은 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죄를 지었을 때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어서 사람에게 맡기시고 다스리게 했지만 이것이 무너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죄는 벌하면서도 죄인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셨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에 한 줄기 생명의 빛을 보았던 예레미야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때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해가 안될 때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괴로워할 때 팔짱을 끼고 가만히 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절망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멜 때에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침묵이 얼마나 무서운지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은 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셔도 나에게는 전혀 관심도 없고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힘이 다 빠지고 더 이상이 소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그 어느 순간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갑자가 어떠한 생각을 불러 일으키시고 잠자는 우리의 영혼을 뒤 흔드는 말씀으로 우리를 소생시켜주시기도 하고, 때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를 일으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온 몸으로 체험한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3:40) 선포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기도할 것을 권면합니다 (3:41) 그리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자신의 눈에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시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4장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원인을 다시 상기하며 슬픈 노래를 다시 부릅니다. 5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해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살다보면 '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떨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힘들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인한 고통이라면 최소한의 자존감이 남아 있겠지만 나 자신의 죄악으로 야기된 고난이라면 마지막 자존심마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5:1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5: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낄 때 우리는 참 많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고 있으니 다른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시련으로서의 고난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을 받을 때는 염치도 없고 길도 없어 보입니다. 자신이 죽도록 밉습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고 안아주는 이도 없는 그런 고난입니다. 스스로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적인 고난입니다. 그러나 죄 가운데 있을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사 우리를 옛적 같이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끄러움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기 힘드십니까? 그러나 부끄러움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잔혹한 고난을 받는 그 때 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절망 가운데, 쓰디쓴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우리가 주님께 돌이킨다면 바로 지금 그 때가 바로 주님이 찾아오시는 때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우리를 주께로 돌이켜 주십시오. 우리는 돌아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새 출발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동안 주님은 너무도 잔인하게 우리를 내치셨습니다. 실로 우리에게 크게 노하셨습니다.
애가가 마지막 애원의 기도로 마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때임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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