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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욥기 핵심 메시지)
안남기목사 2023-04-30 추천 0 댓글 0 조회 261
[성경본문] 욥기23:10 개역개정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본문 : 23:10

제목 :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일시 : 2023. 4. 30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고 하는 시구가 있습니다. 공기처럼 숨을 쉬듯이 인간의 삶 자체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상처를 고난이라 말하면 어떨까요? 고난은 사람들에게 선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일까요? 피조물로 살아가는 한 고난을 숙명처럼 마주 대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상처가 줄어들까요? 나무의 나이테처럼 나이를 먹을수록 상처의 흔적은 늘어만 갑니다.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는 설교 제목처럼 우리의 인생이 상처가 치유되어 별과 같이 빛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전하는 희망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30: 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성경 66권 중에서 욥기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상처를 싸매실 뿐만 아니라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으로 복되게 하신다는 보여준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기의 구절 중에 순금 같이 나온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신앙의 걸음마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읽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욥기는 성숙한 단계에 들어서는 자들을 위한 믿음의 청사진을 보여주는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욥기는 이야기체로 1장과 2, 42장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욥의 독백으로 시작된 3장부터 41장까지는 항변과 애탄의 시의 양식으로 욥과 욥의 친구들, 그리고 욥과 하나님 사이에 벌어지는 지혜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욥기는 나름의 일관성과 논리가 있습니다. 욥과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과 욥이 번갈아 담론을 펼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소발의 대답의 차례에 엘리후가 등장하여 답을 합니다. 이러한 구조를 보았을 때 욥기는 치밀하게 짜여진 완벽한 문학적 구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논쟁의 주제는 무고한 자의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의인이 왜 고난을 받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까닭 없이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는지를 묻고 독자들로 하여금 고난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의 세계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우신분이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악을 멀리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행실과 고백을 볼 때, 그렇게 의롭다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의로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절대적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욥에게 고난이 닥쳤습니다. 어느 날 도적 떼에게 재산을 다 빼앗깁니다. 갑자기 사막에서 태풍이 불어와 집 네 모퉁이가 무너져 내리면서 아들 일곱과 딸 셋이 함께 죽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성 종기라 생겨 밤낮 시달리게 됩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는데,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 퍼붓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건강도 잃고 아내도 잃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욥은 몰랐지만 1장과 2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화의 내용에서 욥기를 읽는 독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은 조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말로 하나님께 기소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선하시다고 믿는 것은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 까닭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욥과 그의 소유물을 빼앗으신다면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욕을 할 것입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감싸고 옹호합니다. 욥에게 믿음을 보여주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의 소유물을 맡깁니다. 1장에서 사탄이 욥을 시험하여 욥의 모든 소유를 빼앗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시험 앞에 욥은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2장에서는 다시 사탄이 두 번째 하나님께 고합니다. 만약 욥의 몸을 괴롭게 한다면 분명 하나님께 욕할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다시 사탄의 손에 욥을 맡기십니다. 사탄은 욥의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 것입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욥의 아내는 사탄이 원했던 대답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말한 것입니다. 이 때 욥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2:10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사탄의 예측이 전적으로 틀린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욥의 믿음을 확인한 것입니다. 욥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욥의 친구들을 통해서 욥을 시험합니다.

 

반전이 나타납니다. 욥이 1장과 2장에서 욥의 온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범죄하지 않은 모습이 나타나지만 3장부터 시작된 욥의 고백과 욥의 친구들과 나눈 대화와 하나님을 향한 탄식의 말들을 보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납득이 안됩니다. 오히려 욥기의 말을 분석해보면 욥의 인내를 말하기 보다는 욥은 불의한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강력하게 항의하는 이야기입니다. 욥은 불의한 고통을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을 피고석에 두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해명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전체의 숲에서 보면 결론과도 같은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친구들보다 욥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42:7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 말은 욥의 하나님을 향한 의심과 항의와 자신의 삶에 대한 저주와 같은 탄식의 과정을 인정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욥기 읽기의 생명력은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부터 시작한 3장부터 42장 욥의 최후의 깨달음에 대한 응답이 이르기까지 숨 막히게 펼쳐지는 논쟁과 변론 그리고 탄식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논쟁의 과정에서 욥의 심정을 느끼고 친구들의 입장도 들어보면서 긴 욥기 읽기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욥의 소식을 듣고 위로하기 위해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라는 세 친구가 욥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멀리서 욥을 바라보고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한 그를 보자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또한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기들의 옷을 찢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리며 자기들의 머리에 뿌리면서 밤낮 7일 동안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2:11-13) 그리고 욥의 고통에 대해 신앙적인 해석을 내리고 욥과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의 주장은 전통적 지혜입니다. 세 친구의 지혜를 요약하면 첫 번째 친구 엘리바스는 죄인은 망하고 악인은 무서운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두 번 째 친구 빌닷은 욥이 당하는 고난은 자녀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악인의 최후는 멸망이라 말합니다. 세 번째 친구 소발은 문제의 해결은 죄악과 불의를 버리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들은 욥의 고통에 대해 죄의 대가라는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사상이 짙게 묻어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욥의 반박이 무엇이었습니까? 욥은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 된 것을 깨닫게 하면 내가 잠잠하겠다고 답합니다. 그리고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말고 증거를 대보아라,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것처럼 죄를 짓지 않았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신다라고 반박합니다. 심지어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의롭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심정을 너무나 솔직하게 토해냅니다. 욥은 자신의 심정을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나의 괴로움을 내게 채우신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9: 17) 나는 이제 아무 희망도 없이 완전히 무력한 자가 되고 말았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욥은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뒤척하는구나 하며 고통스러운 밤을 지새웠습니다. 욥은 이러한 고통 가운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기만 하면 이런 억울함이 해소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얼마나 괴로웠을지 238절에서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으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그의 심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탄식은 절망의 소리이기보다는 탄원의 기도입니다. 아프고 힘들어서 두려워서 외치는 탄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놀랄만한 한 구절이 나타납니다. ‘그러나로 시작되는 10절의 말씀입니다.

 

23: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사람들은 모르지만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은 아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란 내가 당한 처지라 할 수 있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의 외침이 아니라 ! 나라고 예외가 아니구나!” 고난은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것이구나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고난의 시간에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칠흙 같은 어둠의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릅니다. 단지 우리의 고백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일뿐입니다.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을 뵈올 때까지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한창 친구들과의 논쟁 중에 있을 때 욥기에 상담자의 역할을 한 또 한명의 친구가 등장합니다. 바로 이 때 욥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욥기에 나오는 네 번째 친구 엘리후였습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이야기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엘리후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욥을 정죄하지 않고, 욥과 자신은 동일한 사람이며 그가 욥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처받은 욥을 무조건 수용해주고, 그의 마음을 열게 하면서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됩니다. 또한 엘리후는 세 명의 친구들에게 모욕적인 정죄를 받은 욥에게 의로움을 부여하면서 욥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욥의 고통과 상처를 세 명의 친구들처럼 징벌적이고 심판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 아니라, 욥의 존엄성과 가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후는 3510절에서 욥에게 하나님은 밤에 노래를 주시는 분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고난이 오든지 밤에 주시는 은혜가 있을 수 있고, 평안할 때 받지 못하는 은혜도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고 하나님을 뵐 수 있다면 어떤 문제이든 해결의 실마리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곤란을 당할 때 단순히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은 하나님이 곤란의 와중에서 그를 유지시키고 강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은 사람입니다. 밤중의 노래란 고난 중에 누리는 기쁨에 대한 성경적 은유입니다.

 

마음을 열고 있는 욥에게 다른 관점에서 엘리후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권면합니다.

 

35: 5 그대는 하늘을 우리러보라 그대보다 높이 뜬 구름을 바라보라

 

이 권면이 끝나면서 욥기 38장부터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의 세계를 보여주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질문이 시작됩니다. 욥의 마음의 문이 열릴 때 폭풍 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네가 이 우주가 창조되었을 때 있었느냐? 이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지 아느냐? 폭풍이 왜 일어나는지 아느냐? 또한 동물과 식물, 우주의 자연의 세계를 말씀하시면서도 네가 이 이치를 아느냐? 누가 이것을 만들고 운영하는지 아느냐? “라고 질문을 합니다. 혹자는 하나님의 폭포수와 같은 질문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율의 법칙 아래에서 욥에게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욥도 인과율에 근거하여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나는 것입니까? 하며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38장 이하에서 70가지나 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욥은 이 질문들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과 왜소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항복하고 만 것입니다. 욥은 404절에서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은 멈추지 않고 질문을 계속하십니다.

 

40: 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8절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9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이 질문 앞에 욥의 항복 선언이 무엇입니까?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자신의 모든 고통 옆에 계셨던 하나님을 자기 옆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옆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기를 소원했던 욥은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를 깨닫게 되면서 자신을 재와 티끌로 여길 정도로 겸손해지며 영혼이 정화되어서 자신의 상처를 영적인 관점에서 다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대면할 때까지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고난의 분량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앞이 막히고 뒤도 막히고 하나님께서 왼쪽에서 일하시지만 내가 만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볼 수 없는 신앙의 여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어두운 밤에 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나의 진실한 탄식과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될 것이고 우리의 혼탁한 영혼이 정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가 어떻게 시련을 견뎌냈는지를 보시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셨는지 보실 것입니다. 투병중에 있습니까? 억울하고 무고한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여기십니까?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깊은 겸손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때 그 상처를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상처와 고통은 하나님을 보는 눈이 되고, 창조자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힘겨운 고통과 상처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고통을 인과응보로 풀지 않았습니다. 고통이라 부르지 않고 단련이라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고통과 상처는 이 어떤 모습이든 우리가 순금같이 되어 나올 수 있다면 고난은 분명 견딜만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욥기 2310절의 말씀이 우리의 진실하고 절실한 고백이 되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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