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룻기1:19-2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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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본문 : 룻기 1 : 19 -22
제목 :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성경에 여성의 이름으로 기록된 책이 두 권이 있습니다. 에스더와 룻기입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이지만 이방인 속에 살았고, 룻은 이방 모압 여인이었지만 유대인 속에 살았던 여인입니다. 특별히 룻은 이방 여인으로 다윗의 증조할머니로서 예수님의 족보에도 나올 만큼 중요한 인물입니다. ‘룻’이 어떤 인물이었고, 룻기가 어떤 책이었기에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 올릴 수 있었을까요?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1:1)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말씀인 것을 보면 “이보다 더 부패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고자 함입니다. 사사기에서 사람들의 반복되는 어두운 이야기를 읽다보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은 물 건너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러한 무질서와 부도덕한 영적 혼란기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도 사막에서 핀 한 송이 꽃처럼, 시원한 냉수처럼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는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룻기는 지극히 한 개인과 가정의 일상의 사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이나 하나님이 사건 가운데 직접 개입하셨다는 말씀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체 줄거리를 보면 보아스와 룻의 러브스토리의 단편소설처럼 읽을 수 있는 책처럼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룻의 효심을 강조한 교훈적인 글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룻기는 비극적 상황 가운데에서도 세 명의 주인공 룻과 보아스와 나오미의 서로를 향한 사랑과 헌신, 신실함을 통해서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룻기는 4장으로 되어 있는데 4막의 플롯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1막 1장에서는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 땅으로 이주한 한 가정이 소개됩니다. 주인공은 나오미입니다. 살아보겠다고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남편이 죽고, 결혼한 두 아들이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나오미는 비극적 사건을 경험한 후에 자신이 나왔던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 며느리들에게 “너희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 말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기를 원하고 위로 받기를 원한다”는 말로 축복하며 그들을 떠나 보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니의 말씀을 따라 고향에 남게 되고, 첫째 며느리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결정을 내립니다. 이 때 룻의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놀랄만한 신실함을 보여줍니다.
1:16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장면이 바뀌어 이 두 사람이 베들레헴에 도착하였고, 그 성읍 사람들이 “나오미가 아니냐” 반기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그들에게 나를 ‘나오미’(기쁨)라 부르지 말고 ‘마라’(슬픔)라 부르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고통과 지독한 슬픔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다고 한탄하는 말을 합니다.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 가정의 붕괴와 인생의 실패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함에 이른 것입니다. 자신이 무가치하고 부적절하다고 느낄 때 절망을 경험하고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할 때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희망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기대를 하며 룻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룻기 저자는 1장 22절(마지막 절)에서 그들이 “보리 추수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다”는 말씀으로 희망이 있다는 복선으로 마무리를 한 것 같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룻기는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여 칠칠절에 읽는 성경입니다. 칠칠절은 초실절(맥추절)로부터 49일을 세고, 이튿날 즉 5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초실절에 밀 첫 수확을 시작하여, 7주에 걸쳐 밀을 수확하고 그 수확 완성의 기쁨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2장은 룻이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간 뒤에 일어난 일들이 전개됩니다.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객과 가난한 자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삭줍기’였습니다. 마침 그 때가 보리 추수기였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다 할 정도로 낮선 땅, 낮선 사람들 속에서 눈치를 살피며 생존을 위한 이삭줍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건은 자연스럽게 진행되는데 룻기 저자는 2장 3절에서 ‘우연히’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룻은 단지 발길 닿는 데로 갈 뿐이었는데 그 밭이 보아스에게 속한 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마침’보아스가 룻이 이삭줍기를 하던 그 밭에 보아스가 온 것입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사건이라 말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보고 사환에게 “저 여인은 누구의 소녀인가?” 묻습니다. 사환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소녀이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것 외에는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합니다. 이 대답을 들은 보아스는 마치 룻을 알고 있다는 듯이 자비를 베풉니다. 이방인과 과부와 객과 가난한 자들을 환대하라는 레위기의 율법에 순종한 보아스입니다. 레위기 19장 9절에서 확인해 봅시다.
19: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며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보아스는 룻을 향해서 내 딸아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그녀가 목이 마를 때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게 하라고 말합니다. 깜짝 놀란 룻은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묻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가 부모와 고국을 떠나 이스라엘로 온 일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을 다시 축복합니다.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려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2장에서 보아스가 베푼 자비, 헤세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아스가 식사할 때에 룻에게 떡 조각을 주며 배불리 먹게 하고, 룻을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줍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룻은 이삭을 주우면서 매우 신났을 것입니다. 아침에 나올 때는 매우 막막하였을텐데 지금 이삭이 땅에 떨어져 있으니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다시 장면은 시어머니를 저녁에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나오미가 룻이 그 날 있었던 일을 들었을 때에 '보아스'가 보였주었던 말을 듣고 묻어 두었던 희망을 품게 됩니다. 보아스가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룻에게 그 사람은 우리와 매우 가까운 친족인데 우리의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해줍니다. 기업 무를 자는 룻기 이야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푼 보아스를 축복합니다.
2: 20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기업 무를 자’란 가까운 친족으로 친족의 처지를 회복해주는 사람입니다. 친족 중에 한 남자가 자녀와 땅을 남기고 죽었을 때 친족이 그 과부와 결혼하여 가문을 지키는 법이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자격요건은 첫째, 가까운 친척이어야 하고, 둘째, 자원하여야 하고, 셋째,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규정이 율법에 명시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5장에 나타납니다.
3장에서 나오미는 율법이 명시한 기업 무를 법에 따라 조심스럽고도 과감한 계획을 실행합니다. 3막의 장소는 보아스의 타작마당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보아스에게 청혼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행동에 옮길 것을 지시합니다. 3장 3절에서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룻에게 준비를 단단히 할 것을 이야기하고 더욱더 세심하고도 위험스러운 계획을 말합니다. 3장 4절에서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였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마치 여성이 도를 넘어서는 행동처럼 보입니다. 충분히 오해를 받을 수 있으며 위험하기까지 한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며 순종을 합니다. 룻은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제안대로 보아스가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누웠을 때에 룻은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에 누웠습니다.
보아스는 밤중에 놀라 몸을 돌이켜 보니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 것을 보고 네가 누구냐 묻습니다. 이 때 룻이 대답합니다.
3:9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여기서 당신의 옷자락을 펴 덮어 달라는 청원은 보아스가 2장 12절에서 룻에게 축복했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는데 ‘날개’ (카나프) 라는 뜻과 같은 단어입니다. 룻이 그에게 어렵게 청혼하였을 때 보아스는 나오미와 그의 가족의 신실함에 감탄하면서 룻을 ‘현숙한 여인’이라 부른 것입니다. 룻이 그의 발치에서 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보아스는 차분하게 먼저 기업 무를 자의 입장을 들어보고 내가 율법을 지킬 것을 약속합니다.
3:11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3:13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다시 장면은 바뀝니다. 보아스의 약속을 듣고 룻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있었던 일을 시어머니에게 상세히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말합니다.
3:18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나오미는 룻에게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다 하였으니 기다리자”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막이 전개됩니다. 룻과 약속한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무르는데 있어 우선권을 가진 사람과 협상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었는데 마침 친족 중에 보아스보다 기업 무를 우선권이 있는 ‘아무개’씨가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성읍 장로 10명을 청하고 나오미 가정의 사정을 이야기를 하고 먼저 기업 무를 책임을 다할 것인지를 묻습니다. ‘아무개’ 씨의 대답은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개’씨는 단순히 기업을 무른다면 자신의 기업을 확장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기업을 무르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다시 묻습니다. 룻과 결혼하여야 하며 죽은 자의 이름으로 그 땅을 이어가게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아무개’씨는 자신의 집안에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기업 무르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신을 벗는 것으로 양도하였습니다. 기업 무를 권리를 양도받은 보아스는 장로들과 백성들을 불러 놓고 당신들이 증인이 되었음을 공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과 장로들이 축복하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여기까지가 룻기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이야기가 결론에 이르자 1장의 모든 비극이 반전이 됩니다.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이 룻이 재혼하여 새로운 아들을 낳게 됩니다. 나오미는 생명과 기쁨을 회복합니다. 성읍 여인들이 나오미를 향하여 축복합니다.
4: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룻기는 고통받는 이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했던 사사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지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는 신실한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위기와 절망 가운데에서도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려 했던 나오미의 신실함을 보았습니다. 룻의 어머니를 향한 신실함을 보았습니다. 보아스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사기의 전반적인 상황과는 대조되는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며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성경 이야기가 아무리 감동이 있어도 우리의 실존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 이야기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모압은 무엇이며, 베들레헴은 무엇일까요? 손에 딱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많은 위기와 반전의 연속선상으로 만들어지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 우주 속에는 자비로운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손길, 섭리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룻기는 한 가정의 이야기 가운데, 우연히, 마침, 보리 추수 때에 라는 일상의 용어들을 사용하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도 신실하게 자기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해준 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대단원은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일라 할 수 있습니다.
룻기는 부록처럼 4:18-22절은 무미건조하게 보이는 족보 이야기로 마칩니다. 그런데 이 족보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결정적인 섭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맞이하여 오벳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룻기는 오벳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하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족보를 보아스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4:18절에 등장하는 “베레스”까지 소급해 올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레스는 누구입니까?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뿌리가 유다 지파 자손임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룻기가 구속사에 아주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메시야 영원한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다말과 룻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아름답게 쓰임 받았던 인물로 기록된 것입니다.
룻기는 평범한 일상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사건들이 모여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의 사역을 이루어 나가심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룻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일상에서 신실한 헤세드의 사랑으로 서로를 보다듬고 살아갈 때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룻기 이야기의 속편으로 아름답게 쓰여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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